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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결국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E.H.Carr 이토 히로부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안중근이라는 이름이 연관되어 생겨날 것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대표적 독립투사의 명성을 가지며 호국선열의 중요한 사람으로서 평가되던 그 안중근 ‘열사’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사실 이토 히로부미의 인간 자체로서는 한국인으로서 집중해야 할 부분이 한일합병에 대한 부분이 가장 중요한 것이 당연할 것이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는 진실인지 아닐지 모르는 부분이 쫓아다닌다. 그 당시 이토가 러시아 장교에게 "방금 총을 쏜 자가 누구냐?" 라고 물었을 때, "조선 청년이었습니다."라고 장교가 대답했었다. 그 말을 들은 이토는 "바보 같은 놈..."이라고 중얼거린 뒤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그렇게 병원에 실려 가던 도중에 이토가 사망한 것이다. 지금와서 이 일화가 사실인지 아닌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사실이라고 가정한 상태에서 이토의 ‘바보 같은 놈...’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실 일본의 다른 위정자에 비해 이토가 조선에 대해 상당히 유화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조선을 합병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토와 정치적 성향에서 상극을 이루고 있었던 조슈파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같은 인물에 비해서는 비교적 외교적인 협상을 기준으로 관계를 맺어가려고 했다고 한다. 사실 을사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이토는 별로 조선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야마가타가 이토밖에 적임자가 없다고 끝까지 우기는 바람에 이토가 나서게 되었다. 이후 이토는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정도로만 생각하고, 만주지역도 남만주일대까지만 일본의 세력권을 멈추게 하는 등 서구열강들과의 가급적인 충돌을 피하면서 일본의 이익을 유지하려고 했었다. 그러기에 조선을 완전 합병하고 만주를 장악하려는 군부세력들과 계속적인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보았을 때, 이토의 마지막 말이라고 알려진 ‘바보 같은 놈...’이라는 표현에는 자신이 암살당함으로 인하여 조선합병이 확실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호국선열로 받들어 모시고, 조선 합병의 원흉을 제거한 것으로만 인식해왔던 안중근‘의사’는 위 맥락에 따라 해석할 경우, 단순히 급진파 테러리스트로 전락할 위험이 생긴다. 서두에 붙은 “역사란 무엇인가”의 유명한 문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한국 사람이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동양 평화를 꿈꿔왔던 위대한 정치가에 대한 테러리스트에 불과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는 안중근도, 윤봉길도 빼앗긴 우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투쟁의 역사의 산 재물이었던 것이다. 일본 역사를 배운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그래도 상호작용하는 부분의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어떠한 방식으로 다르게 해석이 가능한지를 생각해 보는 일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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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잘못된 평가 기준을 사용하고 있다는 인상-즉 사람들은 스스로 권력과 성공과 부를 추구하고, 그것을 손에 넣은 사람들 존경하며, 인생에서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은 과소평가 한다는 인상-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인간 세상과 인간의 정신생활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동시대인에게 존경받는 위인들 중에는 그 위대함이 대중의 목표나 이상과는 동떨어진 성질이나 업적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위인들의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사람은 결국 고구에 불과하며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위인들한테 전혀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사람들은 생각과 행동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원망 충동도 놀랄 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다.“ -문명속의 불만 서두.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때로는 그 목표를 이루다가 좌절하기도 하고, 고난을 딛고 성공하기도 하며, 의외로 쉽게 목표를 이루기도 한다. 물론 현대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의 목적의식이 불투명한 점 또한 사실이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문명속의 불만] 논문 서두의 글은 단순히 흥미를 던져주는 것 보다 많은 생각을 들게 한다. 어렸을 때부터 가정, 학교와 주변의 많은 매체로부터 습득해왔던 “자아실현”이라는 이상을 목표로 달려가는 인생들이 있다. 우리의 문명이 발달할수록 “자아실현”에 대한 욕망은 더욱 높아져만 갔고, 청소년기에 자아실현의 목표에 대해 확고한 결정을 하기를 놓친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에 접할 때 마다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의 자아실현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과연 자아-내면적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대학 4년생. 아직 취직을 하지 못하고 있는 A군은 최근 가정에서의 정신적 압박에 고뇌한다. 20대 중후반인 그는 학과와 외국어 성적이 나쁠 뿐만 아니라 이렇다 할 특기조차 없어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고 있지 못하는 실정이다. 가족의 생계와는 관계가 없지만, 번듯한 대기업에 취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가족이 불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호작용을 직접 몸소 체험하기도 했다. 가정 내에서의 압박에서도 느끼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친구들과 후배들조차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모습을 보고는 문득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여태껏 살아왔던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가 조금씩 들다가 이내 스트레스로 인해 신체 기능마저 떨어지기 시작한다. “사회적으로 좋은 인식을 받고 있는 기업에 취직하여 많은 보수를 받는 것은 중요한 것.”이라는 강박관념이 그를 사로잡고 자신이 조금 더 어렸을 때 보아왔던 이상과 목표를 잃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다. A군이 느끼고 있는 불만 및 불안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신이 취직하지 못하는 사건”을 만나기 전의 그는 위와 같은 불안을 느낀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겉으로는 ‘열심히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나, 그러한 상황 자체가 그에게 주는 스트레스란 스스로 생각한 것 보다 심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대부분 외부의 권위자로부터 받는 압박에 대한 불안일 것이다. 위의 상황 설명에서 보는 것처럼 그가 일차적으로 압박을 받게 되는 사회는 ‘가정’이라는 인류가 동물적 본능을 벗어나지 못할 때부터 형성되어있던 집단이다. 자아와 가장 근접한 상호관계들이 형성될 수 있는 그 집단에서 오는 압박이란 내면의 슈퍼에고가 공격하는 것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동물적 본능 이외의 대부분의 의식 형성이 가정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오는 압박이 가족 구성원들에 의한 슈퍼에고의 형성 때문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사실 가족단위 외부에서 들어오는 또 다른 권위자로부터의 압박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가족 구성 자체는 이미 형성된 사회에서 발생한 존재들이고 그 객체는 모두 사회에 의해 영향을 받아왔다. 결국 A군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가정의 슈퍼에고는 사회의 슈퍼에고와 동일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며, 그렇다면 A군은 그 자신이 사회의 주어진 길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사회라는 권력에 의해 압박되고 있는 것이라는 당연한 순서를 따라가게 된다. 그렇다면 위 문제에서의 논의는 개인의 자아에 대한 자신의 슈퍼에고의 공격에 의한 죄책감이나 불만이 아닌 듯하다. 권위자에 대한 불만이 가득할 뿐이고, 스스로에게 불만족하는 일은 오히려 피하는 쪽이 긍정적인 의식을 만들어 낼 것 같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를 들여다보면, A군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자아실현”에 대한 사회제도의 방해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잘 먹고 잘 사는”부분에 대한 위기의식이 오히려 강하다고 생각된다. 이건 생각보다 원초적인 문제에 근접한다. A군이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은 본능적인 부분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현대의 사회는 “잘 먹고 잘 사는” 기준이 어느 정도는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고가 여기까지 흘러온 후에 프로이트의 논문을 곱씹어 보면, 아마 프로이트가 말하고 싶었던 ‘문명속의 불만’이라는 주제가 과연 어떠한 생각에서 나왔는지 제멋대로의 해석이 조금씩 가능하다. 인류가 두 발을 딛고 땅에 서서 걸어 다니게 된 이후로 지능이 발달하면서 다른 집단 동물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집단행태를 보인다. 내가 동물들의 행태에 대해서 박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확신하지 못하지만, 개미나 벌과 같이 체계적인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그 집단생활 자체가 본능의 영역이지만, 인간은 그 본능 자체는 오히려 홀로 또는 가족단위의 소단위 활동을 하는 육식동물의 그것과 닮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집단을 이루면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원시적인 인간 집단의 목적은 상대적으로 약한 육체를 자연이나 강한 동물에 대해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그러다 보니 인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공격성향과 성애 등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던 것이리라. 의식이 발달하면서 동물적인 상하의 위계질서 이외에도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서로를 구속함으로서 또한 서로를 보호하기 시작하고 집단 내에서의 개인의 안전을 보장받게 되는 사회를 만들어오게 된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문명에 대한 불만은 보기보다 상당히 원시적인 문제이다. 깨닫고는 있지만,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것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개개인의 본능에 대한 불만과 죄책감을 야기하는 슈퍼에고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은 다시 원시적 동물의 상태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그러한 원시적 동물의 상태 또한 이상적인 욕구 충족의 형태가 아니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더욱 복잡해진다. 어쨌거나 문명이라는 것의 시작 또한 욕구를 만족시켜주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인류의 문명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수천년에 걸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는 원시 문명보다 훨씬 많은 사회적 제약 조건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와 비교해서 눈부시도록 풍요로운 문명사회가 건설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그 안에서 본능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에는 더욱 힘들다. 사회는 그의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자를 성공시킨다. 인간의 공격 본능은 사회를 구성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므로 억눌러야 하고, 성적 본능 또한 인류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성적 욕구불만을 문명의 다른 방향으로 방출시키기 위해, 또는 그 자체로서 갖고 있는 공격적인 성향을 제거하기 위해서, 엄격한 제제사항들을 설치하고 있다. 이 성적 본능에 대한 제한의 부작용은 책의 가장 앞부분에 실린 [<문명적> 성도덕과 현대인의 신경병]이라는 논문에 잘 설명되어 있다. 성적 본능의 억제, 그에 따라오는 폭력적 성향의 억제가 인류의 창조적인 문화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추론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지만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 본능이 만족되는 사회에서 대체적인 방출구가 필요할 리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개인의 죄책감에 대한 문제의 근원은 문명에게 있고, 신경증을 일으키는 것 또한 개인의 문제이니 안타깝지만 자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만 조금 참아준다면 문명사회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여 언젠가 개인의 문제까지 해결시켜 줄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논문의 말미에 써져있는 것처럼 개인의 신경증이 사회 전체의 신경증으로 확산이 되어 그 공격 성향을 어디론가 표출시켜야만 하는 상황이 결국 발생하게 됨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논문 말미에 써져있던 ‘일말의 불안감’은 결국 현실로 나타나서 인류는 사상 최대의 전쟁을 겪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공격 본능을 표출시켜 상당히 많은 ‘(사회적)인간성의 말살’을 경험하게 되었다. (인간성이란 말 앞에 ‘사회적’이라는 단어를 소심하게 붙인 것은 ‘인간의 본능은 서로를 공격하는 본능적인 욕구’라는 것을 위에서 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기대하고 있는 ‘인간성’이라는 것은 문명사회에서 요구하는 그 사회를 무너뜨리지 않는 부분에서의 성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논문 뒤에 실려 있는 아인슈타인과의 서신의 내용에서도 그렇듯이-20세기에 가장 유명세를 탔던 저명한 석학들의 대담이 생각보다 프로이트가 아인슈타인에게 ‘그런게 아니라네 이 친구야...’라는 투로 끝난 것이 재미있다.- 그렇다면 인간 사회가 스스로의 소집단-국가-를 통제하기 위해 더 강력한 레벨의 통제수단을 만들어서 슈퍼에고를 관리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인슈타인의 제안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현재에도 강력하진 못하지만, 그러한 성질의 국제기구가 존재함으로서 설득력을 가진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이야기 하는 부분은 결국 집단 간의 폭력 성향 또한 개인의 그것과 다른바가 아니며 억지로 평화를 강요한들 결국 인간이 사회의 압박에 의해 신경증을 일으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2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고, 그 이후 지금까지 세계에서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국지적인 분쟁에 대해서 사람들이 불안감을 가지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회의 불안감은 곧 개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더더욱 개인의 자아를 옭아매게 된다. 문명사회가 진행될수록 개개인에게 부여되는 제한사항이 점점 많아지는 것 또한 마찬가지 이야기이다. 자아가 느끼는 불만의 정도는 문명의 발달 정도에 비례한다. 그 때문일까, 20세기 중반 이후에 그려진 문화적 창작물에서 우리의 미래는 항상 인간성이 말살된 어두운 미래로 그려지는 성향이 있다. [1984]나 [멋진 신세계]에서 그려지는 미래의 모습은 굉장히 발달된 문명사회에서 인간 본능이 어떠한 식으로 억압받고 통제되는 지를 그려내고 있으며, 그 ‘굉장히 발달된 문명사회’는 오히려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그의 영향을 받은 20세기 후반의 대중문화인 영화에서조차 미래는 대부분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스스로가 신경증에 걸려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것을 대리만족 시켜주기 위한 수단일까. 저 위에 버려진 A군에 대한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자면, 결국 A군이 나 자신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이유는 없을 듯하다. 인류 역사의 발전과 세계 평화에 이르기까지 거창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서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그래서 나에게 지금 작용하는 불만이란 무엇인가?’를 돌아보고 있자니, 조금 한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난 신경증 환자가 아니다. 적어도 아직까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는 확실하게 있으며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거창하게 추론하다가 옆길로 샌 것이다. 내 불만의 원인을 사회에 돌리는 논리를 장황하게 펼친 것인데, 프로이트가 찾아내지 못한 그 해결책을 내가 감히 제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나는 문명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야 할 위치에 있으며 피터버그의 이야기에서처럼 의식적으로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이상 문명사회에 느끼는 불만은 계속 존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잠시 다시 옆길로 새는 분위기지만,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라는 저서가 생각이 난다. 그는 열역학 제2법칙에서 정의된 엔트로피가 그 에너지의 문제로 인해 결국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다. 300페이지가 거뜬히 넘어가는 그 저서에서 내내 대책을 세웠다가 그것을 부정하는 일을 반복하고 나서는 결국에 가서 이야기 하는 것이 ‘인간 도덕성에 의존한 반反 엔트로피를 만들어 내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라고 이야기 한다. (이 부분이 상세하게 설명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한다. 오로지 수년 전에 읽었었던 기억에만 의존하였기 때문임을 밝힌다.) 이 결론을 바꾸어 말하자면, 이성에 의해 강력하게 통제된 생활만이 우리 사회를 위기에서 구하고 계속해서 여유로운 문명사회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쾌락을 위해서 페라리를 타고 300km/h로 질주하는 일 따위는 인류의 파멸을 불러온다는 이야기렷다. 결국 문명사회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본능 따위는 억제하면서 사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결론에 또한번 이르게 된다. 문명사회를 진행시키면서 신경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모두 성인군자가 되어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여도 세상에 거스를 것이 없더라.’라고 말씀하신 공자님처럼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겠다. 그래서 최근에 동양적 정신이 서구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농담 같은 이야기도 설득력 있어 보인다. 결국은 지금 나를 옭죄고 있는 심리적 압박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해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유일한 수확임을 인정해야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에게 작용해 올 슈퍼에고를 진정시킬 수 있는 대리만족 수단을 찾아내야 하고, 그것이 사회만이 만족하고 본능에 충실하지 못한 일이라 할지라도, 불만은 가지지만 일탈하지 않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스스로를 안정시키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이라 결론 내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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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스베이트 Plluto's cheerful Gehenna 이런저런 이야기 : Revolution 초자공동체의 千像萬想 自己回歸 Paradigm City 초보 라이더의 라이딩 일지 최근 등록된 덧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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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omi at 04/06 hello by Naomi at 04/06 nice by Robert at 04/06 nice by Robert at 04/06 http://www.hillary.org/hc.. by Buddy Hint at 08/05 ㄳ by 오미영 at 07/07 그...그렇네요. 검은것이.. by GunKid at 01/14 그림이 멋집니다. 내용은….. by 영원제타 at 01/13 와하하. 새출발을 해 보려고.. by GunKid at 11/05 옛글들이 사라졌군요. 웬일.. by 잠본이 at 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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